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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polio/cartman

노 스모킹 오케스트라

Music is a Miracle
에밀 쿠스트리차 & 노 스모킹 오케스트라

지난 6월24일, 에밀 쿠스트리차가 한국을 방문했다. 영화감독 자격으로서가 아니라, 집시 록 밴드 ‘노 스모킹 오케스트라’의 멤버로서. 2시간 동안 펄펄 끓는 에너지를 불어넣은 콘서트는, 쿠스트리차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흥겨운 난장이었다. 그 열기와 광기를 되새겨 본다.

광기 어린 난장
벌판 위에 친 천막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땅 위의 먼지가 터질 듯한 사운드에 놀라 공중에 들끓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LG아트센터는 국내 최고의 음향시설을 자랑하는 공연장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에밀 쿠스트리차 & 노 스모킹 오케스트라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거장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고는 해도, 이들의 음악을 어찌 질서정연하게 앉아서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무대에서는 중년 아저씨들이 펄쩍펄쩍 뛰어다니는데, 객석에 앉아 상반신만 들썩이는 나 자신이 영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시종일관 내지르고 악다구니를 쓰는 사운드에 도저히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을 재간이 없었다. 공연이 3분의 1쯤 흘러갈 무렵, 무언가에 홀린 듯 관객들은 일제히 스탠드 업! 진정한 콘서트, 아니 진정한 난장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기타를 든 영화감독
솔직히 세르비아의 펑크 록 밴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쿠스트리차의 영화를 보며 쿵짝쿵짝 하는 마술적인 비트에 홀리긴 했지만, ‘뮤지션’ 쿠스트리차보다 ‘감독’ 쿠스트리차에 관심이 쏠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날의 공연은 온전히 쿠스트리차가 이끌어가는 것이리라 상상했다. 하지만 예상 외로 쿠스트리차는 말을 아꼈고, 무대 한켠에서 묵묵히 기타줄을 튕길 뿐이었다. 대신 공연의 주도권은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인 넬레 카라질리치에게 넘어갔다. 보컬 외에도 무대 위에는 드럼, 키보드, 바이올린, 튜바, 색소폰 등 여러 연주자들이 모여 떠들썩한 잔치를 벌였다. 일단 의상부터 기가 막혔다. 카라질리치는 프릴이 달린 새빨간 의상을 위아래로 맞춰 입었고, 파란 셔츠에 흰 나팔바지 차림의 연주자들은 이발소에 걸린 오래된 사진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때론 준비운동하는 축구선수처럼, 때론 거나하게 취해 막춤을 추는 노동자들처럼, 뮤지션들은 펄쩍펄쩍 무대 위를 뛰어다녔다. 그리고 당연히(!) 공연장 안의 온도는 점점 올라갔다.

웬만하면 포르티시모
1980년에 결성된 노 스모킹 오케스트라는 정치적인 탄압 때문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밴드. 스스로 “반항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라 정체성을 규정짓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음악이 팍팍한 세상에서 항우울제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폭탄 소리마저 진압할 것 같은 강력한 사운드는, ‘내전 속에서도 열심히 연애하고 즐기자’고 주장하는 쿠스트리차의 영화와 참 많이 닮았다. 이번 공연에서 들려준 <언더그라운드>(95)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98), <삶은 기적이다>(04) 등 쿠스트리차 영화의 삽입곡들은 다시 한 번 그 치유의 순간들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능청스럽게 오페라 한 자락을 뽑다가도 금세 펑크 록으로 넘어가고, 3미터 이상의 거대한 활까지 동원해 귀여운 퍼포먼스를 보인 멤버들. 이들은 한 번 시작한 연주를 좀처럼 멈출 줄 몰랐고, 사운드는 청각이 마비될 정도로 시종일관 포르티시모로 달렸다. 터질 듯한 흥분을 주최 못한 보컬, 급기야 프릴 블라우스를 벗어 던졌다. 뱃살이 출렁거리거나 말거나.

줄리엣을 찾아서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아예 앞자리 좌석을 예약하지도 말 것. 툭 하면 객석으로 뛰어내려와 춤을 청하는 멤버들 덕분에, 앞쪽에 앉은 관객(특히 여자들!)들은 공연 내내 긴장해야 했다. 이날 관객들은 그야말로 마을 잔치에 초대된 손님이나 마찬가지여서, 팔짱 끼고 구경만 했다가는 오지랖 넓은 보컬에게 혼이 날 판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쿠스트리차가 객석에 조명을 비춰달라고 청한다. ‘Was Romeo Really a Jerk’(로미오는 정말 바보였나)를 부를 건데, 줄리엣을 찾기 위한 아주 중요한 시간이라나. 그리고 간택된(!) 처자가 무대 위에 올라오는데, 춤추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기시감이 느껴진다 싶었더니, 그녀는 바로 영화배우 예지원. 무대를 휘젓고 다니며 무아지경으로 추는 예지원 앞에선 천하의 쿠스트리차도, 막춤의 대가 카라질리치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후일담을 들어보니, 쿠스트리차도 예지원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한다. 수백 명의 관객 중 끼 많은 배우를 알아본, 쿠스트리차의 예리한 선택이었다.

다함께 ‘운자 운자’
공연은 막바지로 흘러갔다. 팔이 빠져라 흔들어대고 손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치는 가운데, 공연장 안의 열기는 높아져만 갔다. 감히(!) 자리에 다시 앉는 관객도 없었다. 드디어 마지막 곡. 멤버들은 수십 명의 관객들을 무대 위로 불러 모은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의 마지막 축제 장면이 재현되는 순간이다. 그 가운데 ‘아이 러브 세르비아’가 적힌 팻말이 위풍당당하게 지나가고, 계속되는 쿵짝쿵짝 4분의 2박자의 비트. 이 리듬을 의성어로 표현한 ‘운자 운자 음악’은 곧 노 스모킹 오케스트라가 창조한 새로운 장르이기도 하다. 보컬 카라질리치의 표현에 의하면, 이 음악은 사랑을 샘솟게 하는 특별한 단백질 성분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래서 기도문을 외우듯 ‘운자 운자’란 단어를 두 번 이상 반복해서 정기적으로 읊어주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 항우울제는 어느 정도 효험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신앙심을 발휘해 다시 한 번 읊어본다. 똥물을 뒤집어쓰고 허우적거리거나 말거나/ 운자 운자/ 삶은 기적이다/ 운자 운자/ 음악도 기적이다/ 운자 운자.

<SCREEN>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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