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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 <크크섬의 비밀>

별난 인생, 별난 표류기

시트콤이 세트 밖으로 나갔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제작진이 다시 뭉쳐 만든 40부작 시트콤 <크크섬의 비밀>. 미국 히트 드라마 <로스트>를 살짝 비튼 건 맞지만, <크크섬의 비밀>은 거대한 음모 드라마라기보다 별난 인종들을 요목조목 관찰한 인류보고서에 더 가깝다.

노아의 방주에 선택된 동물들 중에는 겹치는 종이 하나도 없었다. 세상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번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종들이 살아남았을 뿐이다. 이런 경제적인 법칙은 드라마, 특히 시트콤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캐릭터의 재미가 극 전체의 재미를 좌우하는 시트콤에서, 비슷한 성향의 인간들은 거의 없다. 그들은 한 공간에서 숨쉬고 함께 살아갈지라도 애초에 다른 유전자를 지닌 존재들이다. 때문에 캐릭터 각각을 관찰하는 재미와 그 캐릭터들이 충돌할 때 빚어내는 시너지 효과까지 동반되는 것이다. 엄청난 신드롬을 남기며 종영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만 봐도 알 수 있다. 단순한 놈, 까칠한 놈, 독한 놈. 이순재의 집안에 모인 캐릭터들을 전부 모아놓으면, 인류의 대표선수를 집합시켜놓은 것처럼 다채롭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송재정 작가와 김영기 PD가 만든 어드벤처 시트콤 <크크섬의 비밀>도 다르지 않다.

세트에서 벗어난 시트콤

<크크섬의 비밀>은 여름 시즌을 공략한 40부작 시트콤으로, 회당 25분 분량의 짧은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이 시트콤이 기존 한국의 시트콤들과 가장 차별화된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답답한 세트를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크크섬의 비밀>은 간간이 등장하는 회상 신과 교차 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장면이 섬을 배경으로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웃지 못할 사연이 있다. 일일쇼핑 구매부 직원들이 낙도로 후원물품을 전달하러 가던 중 조난을 당한 것이다. 배 위에서 술에 취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깨어보니 외딴 무인도의 백사장.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처럼 엄청나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바다 건너 육지가 보이는데다 한동안 버틸 식량과 물품까지 준비되어 있다. 자, 그렇다면 이들이 표류한 ‘크크섬’은 치열한 생존의 공간이 아니라 비교적 안락하게 지낼 수 있는 생활공간이 된다.

그래도 궁금하다. 대체 어떤 음모가 작용해 이들은 크크섬에 표류하게 된 것일까. 게다가 직원들의 휴대폰은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이며, 왜 염주임은 시체로 발견된 것일까. 이런 설정 때문에 <크크섬의 비밀>은 시트콤답지 않게 ‘스릴러’ 장르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크크섬의 비밀>은 에피소드가 진행될수록 비밀의 열쇠를 조금씩 흘리는데, 그래도 크크섬을 지배하는 것은 거대한 음모가 아닌 것 같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역시 가장 시트콤다운 요소인 사소한 디테일들에 있다. 거기에는 코미디는 물론 멜로와 공포, 감동 드라마의 요소까지 구석구석 배어있다. 이건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시트콤과 멜로를 적극적으로 뒤섞은 송재정 작가와 김영기 PD의 색깔이기도 하다.

“미스터리를 파헤치기보다 생각 없이 웃고 즐기라”는 송재정 작가의 말처럼, <크크섬의 비밀>은 미시적인 관점으로 볼수록 더욱 재미있어진다. 사무실 밖을 벗어나긴 했지만, 크크섬은 직장 내의 위계질서가 그대로 유지되는 곳이다. 김부장(김선경)과 김과장(김광규)의 관계만 봐도 그렇다. 김부장은 풀밭에 오줌을 누는 불편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이며, 김과장은 무인도에서마저도 딸랑거리다가 김부장에게 똥개 취급을 받는다. 이런 디테일들과 회사에서 미처 해결되지 못했던 연애사, 원시적인 생활을 하며 새롭게 무르익어가는 관계들이 크크섬을 다채롭게 장식한다.

2% 부족한 자들의 섬

<크크섬의 비밀>의 첫 장면. 무인도에서 깨어난 신과장(신성우)이 위기상황을 깨닫고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이때 하늘 위를 유유히 날아가던 새가 신과장의 입 속으로 똥을 싼다. 이런 굴욕을 당하지 않아도, 그는 표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해 회사에서 ‘낙하산’ 취급을 받던 신세인데. 김부장으로부터 “당신이 도면 신과장은 ‘빽 도’야”라는 소릴 들은 김과장은 더 가관이다. 섬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마침 중국 배가 섬 근처를 지나간다. 중국어를 배운다고 거짓말하고 회사 돈으로 탱고를 배웠던 김과장은, 식은땀을 흘리며 중국인을 향해 외친다. “나는 중국어를 할 줄 압니다. 당신은 중국어를 할 줄 압니까?… 당신은 학생입니까? 나는 학생입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김부장 역시 간밤에 자신이 싸놓은 오줌 줄기를 은폐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윤대리(윤상현)와 심형탁과 이다희는 뜻하지 않게 골치아픈 삼각관계에 휘말린다.

이처럼 크크섬에는 어딘가 조금씩 결여된 사람들이 모여 산다. 그들은 매순간 굴욕적인 상황에 노출돼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 인간적이고 사랑스럽다. 탈출을 위해 뗏목을 만들고 오늘 당장 야외 화장실을 만들어야 할지라도, 그들에겐 화투패를 돌리고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장난을 치는 일도 중요하다. 직원들을 이끄느라 피곤한 김부장에게도 신과장의 ‘300복근’에 반할 잠깐의 여유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테리우스’ 신과장과 ‘람세스’ 김과장에게는 노동 후에 즐기는 달콤한 가무의 순간이 있다. 위기상황에서도 이해와 공감대가 무르익어가는 섬, 매일을 축제처럼 즐기는 철없는 인종들의 섬. 크크섬에 서식하는 인생들은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SCREEN> 200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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