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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polio/cartman

故 천지호 언니를 추모하며



사랑했던 천지호 언니, 언니가 이 지랄맞은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다섯 밤이 지났수. 그 사이 대길이는 언니 무덤에 돌을 쌓아주고 제 갈 길을 떠났지만, 내게는 아직도 언니의 진한 발 냄새가 코언저리를 헤매고 있수다. 난 아직도 언니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아요. 굳이 18회에서 죽어야 했는지 이유도 잘 모르겠고. 언니가 축지법 쓰는 황철웅을 피해 ‘천사인 볼트’처럼 도망쳤을 때, 그 살인귀가 언니한테 이렇게 말한 거 기억나우? “어느 골에서 허망하게 죽지 말고 꼭 살아 있거라”라고. 그런데 이게 뭐요. 차라리 조선 제일의 살인귀한테 멋지게 죽을 것이지, 근본도 모르는 포졸에게 화살 맞고 30분간 피 흘리다 허망하게 죽어버렸잖아요. 누구보다 생명력이 질길 것 같던 언니가 “발가락 긁어달라”는 지저분한 유언을 남기며 낄낄거리다 죽어갈 때, 저는 한참이나 웃다 울기를 반복했습니다.

언니, <추노>는 계급과 이상이 다른 사내들이 어지럽게 충돌하고 터지는 곳이에요. 조선 제일의 무관 송태하의 순발력과 대길이의 맨몸 액션, 황철웅의 날렵한 검술은 공중파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때깔’을 만들어냈지요. 세 남자가 서로에게 창끝을 겨눌 때 만물이 고요해지고, 갑자기 <매트릭스>의 불릿 타임이 만들어지는 거 보셨수? 그러나 <추노>가 만들어내는 이 자아도취의 영상 속에서, 언니가 설 곳은 없었어요. 언니에겐 우아한 발차기보다 굴욕의 몸 개그가, 재빠른 손놀림보다는 걸쭉한 입놀림이 더 어울렸거든요. 그러고 보니, 전 언니의 제대로 된 액션을 본 적이 없네요. 아무리 봐도 언니는 잔머리 굴리는 지략가 쪽이지, 무사는 아닌 것 같수.

그러나 언니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언니야말로 진정한 ‘짐승남’이라고 생각했어요. 특히 때 낀 발가락을 후비던 꼬챙이로 이를 쑤시는 호방함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수. 언니, 사실 나는 지금 <추노>의 인물들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요즘 들어 드라마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게 사실이잖수. 이건 뭐랄까, 흥할 때는 직원들 잔뜩 뽑아놨다가 점점 수습이 안 되니까 하나씩 정리해고하는 아마추어 기업 같수. 언니는 그중 최후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는데, 내 말이 맞죠? 그러나 언니는 죽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어요. 외관은 가장 지저분했지만, 마음은 가장 단순하고 순수했으니까요. 투명한 비즈니스를 할 줄 알지, 거리의 법도를 중요시하지, 게다가 원수는 꼭 갚는 원칙주의자였지. 이보다 훌륭한 추노꾼이 어디 있겠어요.

천지호 언니. 나는 언니가 철웅의 부인을 찾아간 그날 밤을 잊지 못합니다.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언니는 “그냥 누구에~요”라고 능글맞게 대답하셨죠. “뭣 때문에 왔느냐?”는 말에는 “아휴, 그냥 뭣 때문에 왔어요”라고 대답했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인을 살려주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는 잔혹한 대사에 몸서리를 쳤지만, 저는 언니의 저 허무 개그가 더 마음에 들었어요. 저잣거리에서 수십 년을 굴러먹은 경험은 역시 무시할 수 없나 봐요. 언니는 일찌감치 인생의 허망함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언니만큼 만만찮은 허풍쟁이 ‘짝귀’가 새로 등장했지만, 사람들은 언니가 남긴 주옥같은 철학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내심 대길이와 언니의 ‘듀오 결성’을 그토록 바랐지만, 언니가 세상을 떠난 이상 이제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어요. 다만 지금도 황철웅이 지나가는 길목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할 뿐입니다. 칼 한 번에 임영호 대감과, 칼 한 번에 이름 모를 제주도 궁녀와, 칼 한 번에 수많은 포졸과 유생들. 그리고 언니가 그토록 목놓아 부르던 만득이, 만득이, 만득이! 그러나 살인의 계절이 지나고 마침내 봄이 오면, 초콜릿 복근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위에 천지호만을 위한 스핀오프 드라마가 피어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MOVIEWEEK> 2010. 3. 17, NO.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