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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polio/ryucat

단순한 기술이 좋다

 

얼리어답터, 프로슈머가 미덕인 세상. 하지만 때로는 눈 돌아가게 발전하는 신기술이 피곤하다. 꼭 새로운 디지털 기술에 발 빠르게 적응해가야 하는 걸까?

25년 쯤 전에는 매일 밤 기계식 타자기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활자가 실린더 위에 놓인 종이를 때리는 소리, 땡 하고 울리며 다음 줄로 내려가는 소리. 아버지 타자기는 가끔 장난감으로 둔갑하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타자를 배웠다. 타자기는 불편했다. 수정을 하려면 수정액을 쓰거나 새 종이를 끼워 처음부터 다시 타자를 하는 수밖에 없고, 문장을 잘라 다른 자리에 붙이기나 자동 맞춤법 검사 같은 건 기대도 안했다. 그러다 어느 때인가 기계식 타자기는 전동식 타자기로, 다시 워드 프로세서로 바뀌더니 드디어 컴퓨터가 책상 위를 차지했다.

그 시절 한글 1.5만 해도 놀라웠는데, 지금 쓰는 한글이나 워드 프로그램은 아예 못하는 게 없다. 집에서 문서를 편집하고 바로 프린트해도 책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만능이다. 각 장의 제목을 딴 목차도 만들고, 글 쓰는 과정을 추적하는 기능으로 이전에 지웠던 부분을 찾아서 살려내는 것도 쉽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기능들을 사용하고 있을까. 오히려 '편리한' 자동 기능을 갖춘 프로그램 때문에 원치 않게 문서의 열이나 줄이 흐트러지거나, 이상한 서식이 들어가거나, 문서를 날려 낭패 보는 경우가 일어나지 않나. 작업이 복잡해지니 생각할 것도 많고 오히려 시간도 더 걸린다. 대개 지금의 워드 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기능은 워드 프로세서나 한글 1.5 프로그램의 재주만으로도 충분히 소화 가능했다. 업그레이드 되는 소프트웨어가 갈수록 무거워져 컴퓨터를 느리게 만드는 건 또 어떤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디지털카메라도 그렇다. 디지털카메라의 기능 중 몇 퍼센트나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소수의 적극적인 사용자를 제외하면, 메뉴 안을 들여다봐도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으며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기능들이 가득하다는 생각을 할 거다. 매뉴얼을 읽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는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온다.

불만은 더 있다. 기술이 진화하면 그걸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 방식도 바뀐다. 글쓰기만 두고 생각해도 그렇다. 컴퓨터를 한참 어른이 된 뒤에 접한 세대는 이미 기승전결을 머릿속에 구상하고 첫 문장부터 써 나간다. 퇴고의 과정은 최소화된다. 반면 컴퓨터로 자란 세대는 대개 생각나는 것을 두서없이 타이핑하고 수정하고 자르고 붙이며 문단을 재구성한다. 이런 '카오스식' 글 쓰기가 나쁘진 않지만,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기 전에는 체계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두뇌의 한계가 느껴진다. 이건 신기술에 의한 진화가 아니라 오히려 퇴화 아닐런지. 게다가 기술이 영리해지고 치밀해질수록 그 사이에 사람의 정서가 끼어들 여지는 줄어든다.

각종 번쩍이는 기능들을 갖춘 워드 프로그램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게 IBM 컴퓨터용 Q10이나 애플 컴퓨터용 화이트룸 같은, 기능도 무게도 단촐한 워드 프로그램들이다. 이 프로그램을 설치해 실행시키면 까만색, 또는 흰색 화면이 뜬다. 타이핑을 하다가 지우고 다시 써나가는 건 물론 된다. 잘라 붙이는 기능은 단축키를 사용하면 쓸 수 있다. 하지만 그 외의 편집 기능은 없다. 오래 전 사라진 워드 프로세서 기능 정도랄까. 이 정도면 충분하다. 까만 화면, 그 위에 단정하게 찍혀 나가는 활자를 마주한 나의 두뇌는 번잡한 생각 없이 침착하게 작동한다. Q10은 애교스럽게도 타자기 소리를 흉내낸 사운드 설정이 있어 즐겁기까지 하다.

물론 괜한 향수에 휩싸여, 녹슨 아버지 타자기 꺼내 사용하진 않을 거다. 이미 길들여진 글쓰기 방식을 완전히 버리진 못할테니. 다만 일상에서 사용하지도 않는 신기술들로 무거워진 '디지털 라이프'에 다이어트가 필요하진 않을까.

<루엘> 200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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