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rtpolio/cartman

청춘에게 면죄부를 허하노라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 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

진화한 건 왕자커피숍의 인테리어만이 아니었다. 가군과 나양은 남장여자 해프닝을 넘어 평범한 연인이 됐고, 10년 커플 A군과 B양도 막 연애의 위기를 하나 넘었다. 순정만화의 온갖 클리셰를 끌어왔지만, 그 안에서 트렌디드라마의 새 문을 연 <커피프린스 1호점>. 여기에는 너무 달지만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청춘의 절정이 있다.

따지고 보면, <커피프린스 1호점>은 1회부터 판타지였다. 먹어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우리의 여주인공 고은찬(윤은혜). 칼로리 덩어리 자장면을 몇 그릇씩이나 후루룩 마셔도, 잠자기 전 아무리 아이스크림을 퍼먹어도, 그녀는 절대 살이 찌지 않는다. 카페라테와 무설탕 아메리카노 사이에서 고민하던 김삼순의 처절함을, 고은찬이 알 리가 없다. 그녀가 사는 공간도 마찬가지다. 일찌감치 근로청년으로 살다 보니 성 정체성마저 모호해졌건만, 고은찬의 집에는 삶의 무게 대신 영롱한 추억들로 채워져 있다. 이멜다 만큼이나 구두를 사랑하는 철딱서니 엄마도 정도는 지킨다. 공부엔 영 취미 없는 여동생도 가끔은 훌륭한 연애 상담자가 되어준다. 웬일인지, 산더미처럼 까놓은 밤도 그리 궁상맞아 보이진 않는다. 참 이상한 집이다. 생계의 과제는 남아있지만 땀냄새는 나지 않는 곳. 이곳은 순정만화에서 불시착한 공간임에 틀림없다.

소년, 소녀에 머문 사람들

<커피프린스 1호점>의 순정만화 같은 공간에는 순정만화 같은 인물이 산다. 가장 먼저 고은찬. 그러니까 애초에 고은찬은 남장여자 행세를 할 의도가 없었다. 살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뿐이고, 딱히 남자처럼 군 적도 없다. 오히려 ‘기집애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기 일쑤다. 연애가 뜻대로 안 될 때면 이불 뒤집어쓰고 목놓아 울기도 한다. 하지만 고은찬이 사랑스러운 건, 남자처럼 보여서도 아니고, 알고 보니 여자여서도 아니다. 그건 바로 24살 또래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소년성 때문이다. 닳고 닳은 어른들의 연령대마저 낮춰버리는 전염성이랄까. “너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뭔가가 있어.” 언젠가 최한성(이선균)이 말했던 것처럼, 고은찬은 보는 이의 엔돌핀을 솟아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커피프린스 1호점>에는 유난히 아이 같은 어른이 많다. 혼자 레고를 갖고 노는 최한결(공유), 하드를 쭉쭉 빨거나 도미노 놀이를 하는 한유주(채정안), 그리고 고은찬과 유년의 순간들을 만끽했던 최한성. 심지어 한량 홍사장(김창완)은 더러운 자취방에서 만화 삼매경에 빠져있고, 은찬의 엄마와 정육점 아저씨는 초등학생 수준의 감정 줄다리기에 한창이다. 커피프린스 1호점은 또 어떤가. ‘완소남’이란 카테고리 아래 묶인 종업원들은, 소풍간 아이들 마냥 들뜨고 신나 보인다.
철없고 유치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이것이 저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보통의 드라마 주인공들이 술이 떡이 되어 신세한탄을 할 때, <커피프린스 1호점>의 사람들은 유년기로 돌아가 나름의 고민에 빠진다. 이렇게 <커피프린스 1호점>은 은찬을 비롯한 모든 인물과 공간들을 살포시 끌어안는다. 가난하지만 서정적인 은찬의 집도, 들어서기만 하면 어느새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마는 한결의 집도, 서울에 저런 공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근사한 한성과 유주의 집까지, 모두 토닥토닥 위로를 건네는 것만 같다. 여기서 고은찬은 이 모든 것들의 중심이다. 때문에 고은찬이 소년성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고은찬이 섹시해지는 순간, 게임 끝이다.

남주2, 여주2의 작은 진화


로맨스를 권하는 공간, 자라지 않는 어른들, 소박한 축제 같은 일상… 그리고 가장 스펙터클한 화두가 남았다. 남장여자 고은찬의 정체는 언제 밝혀질 것인가, 하는 타이밍의 문제. 때문에 사실상 <커피프린스 1호점>은 11회에 완결됐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네가 남자건 외계인이건 상관없어. 갈 때까지 가보자.” 은찬을 남자나 여자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사랑하겠다던 한결의 다짐이 배신당한 순간이었다.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커피프린스 1호점>의 서스펜스는 굉장했다. 한성이 처음부터 은찬을 여자로 인지하고 마음이 흔들렸던 반면, 드라마는 온전히 한결의 마음에 따라 흘러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이 드라마는 순정만화의 루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속아주는 재미랄까. 끌어안으려는 순간의 망설임, 흔들리는 성 정체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이미 깊어진 마음. 이런 떨리는 순간들을, <커피프린스 1호점>은 섬세하게 담아낸다. 이건 온전히 연출의 승리다.

그럼에도 한결과 은찬이 평범한 닭살커플로 안착한 지금, 드라마는 조금 힘을 잃은 감이 있다. 이들이 마음껏 애정을 확인한다 해도, 남남 커플일 때의 긴장감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3회를 어떻게 채울지, 조금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불완전함을 채워주는 것은 남주2와 여주2의 몫으로 보인다. 보통 드라마에서 남주2와 여주2가 복잡한 사각관계를 만들어준 데 비해, 여기서는 독특하게도 주인공들의 평행선상에 놓여있다. 막 연애를 시작한 한결과 은찬, 그리고 숱한 흔들림을 겪은 10년 커플 한성과 유주. 한결과 은찬이 10년쯤 사귄다면 한성과 유주처럼 될 수 있을까. 한성-유주 커플은 한결-은찬의 거울 같은 존재들이다. 세상에는 이런 커플도 있고, 저런 커플도 있기 마련이다. <커피프린스 1호점>의 중심은 물론 한결과 은찬이지만, 한성과 유주는 이 커플의 갈등을 만들어주는 장치만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온전한 스토리가 있는 것이다. 이것도 진화라면 진화다.

달짝지근한 청춘예찬


<커피프린스 1호점>은 서사가 중요한 드라마가 아니다. 기존 드라마에서 그 흔했던 회상 신조차 별로 없다. 은찬이 아버지와의 한때를 회상하는 장면조차, 은찬의 맑은 캐릭터를 강조하는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커피프린스 1호점>이 집중하는 것은 청춘의 순간들을 잡아내는 것이다. 은찬과 한결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장면이라든가, 은찬이 잠든 한결에게 후~ 하고 숨결을 불어넣는 장면, 심지어 “당신은 나를 안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내가 여자라고 말하고 싶어졌으니까요” 등의 낯간지러운 내레이션까지, 온전히 청춘의 현재를 예찬하는 부분들이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재벌2세와 출생의 비밀, 삼각관계가 나오지만 그 갈등은 그리 깊지 않다. 모든 해답은 지금, 여기서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커피프린스 1호점>은 지나치게 달짝지근할 때가 많다. 골방에서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읽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커피프린스 1호점이란 공간도 마찬가지다. 선기와 하림, 민엽 모두 각각의 로맨스가 있지만, 이들 사이에도 묘한 연대감이 존재한다. “난 형이든 오빠든 상관없는데요”란 선기의 대사처럼, 이들에겐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이 깔려있다. 그러고 보면, 커피프린스 1호점은 청춘의 현실을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나 마찬가지다. 성별, 나이를 넘어 청춘의 한때를 즐기는 사람들. 이들은 청춘이란 면죄부를 부여받고, 열심히 사랑하고 열심히 살아간다. “지금 당장은 죽을 것 같아도, 세월 지나면 다 그게 그거야. 그래서 청춘이 좋은 거 아냐.” 홍사장이 남긴 명언처럼, 그래서 청춘이 아름다운 것 아닌가. 젊은 사람에겐 아름다운 시기를 누릴 수 있어서 좋고, 나이든 이에게 추억의 에너지를 남겨주는, 그런 청춘.

<MOVIEWEEK> 2007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