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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polio/cartman

단막극 폐지에 반대한다

장기적인 시선으로 돌아보라
마지막 단막극 <드라마시티> 폐지가 의미하는 것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은 눈부셨다. 하지만 MBC <베스트극장> ‘간직한 것은 잊혀지지 않는다’의 전도연 역시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전국 5백만을 돌파한 영화 <추격자>의 김윤석 이전에는 KBS <드라마시티> ‘아나그램’과 ‘제주도 푸른밤’의 김윤석이 있었다. SBS 드라마 <조강지처클럽>에서 안내상의 연기력을 의심하는 바는 아니지만, <드라마시티> ‘내일 또 내일’의 전신마비 장애우 연기는 지금도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배우들뿐만이 아니다. <커피프린스 1호점>으로 스타급 연출자가 된 이윤정 PD나 노희경 작가,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도우 작가, <얼렁뚱땅 흥신소>의 함영훈 PD 등 대다수 PD와 작가들이 ‘단막극’이란 1차 관문을 통과했다. 말하자면, 단막극은 드라마 장르에 있어 ‘신춘문예’와 같은 역할을 해온 것이다.

단막극의 효능은 보통 주말연속극이나 미니시리즈보다 뒤늦게, 그것도 아주 잔잔하게 나타난다. 물론 방영 당시에는 신인들의 실험정신이 크게 주목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 신인들이 가능성을 인정받고 사람들이 그들의 초기 작품을 다시 찾아보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단막극의 시청자들은 일반 시청자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다. 하지만 그 적극적인 시청자들은 이제 ‘찾아볼 권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지난 3월29일, ‘돈꽃’을 마지막으로 KBS <드라마시티>가 폐지됐기 때문이다. ‘돈꽃’의 시청률은 5%. ‘돈으로 인한 욕심 때문에 행복을 보지 못한다’는, 마치 <드라마시티> 폐지 결정에 항거하는 듯한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

‘돈꽃’의 소박한 울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드라마시티>는 죽어버렸다. 4부작으로 방영될 진짜 마지막 편 ‘살아가는 동안 후회할 줄 알면서도 저지르는 일들’은 아예 빛도 보지 못했다. 유사 단막극 장르인 MBC <베스트극장>과 KBS <TV문학관>, SBS <70분 드라마> 등은 일찌감치 사라진 상태. 그나마 남은 마지막 단막극 <드라마시티>마저 시장논리에 굴복하면서, 이제 한국에서는 ‘단막극’이란 장르가 완전히 멸종되고 말았다.

폐지 이후, 대안은 있는가

<드라마시티>의 시작은 1984년 <드라마게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중간에 몇 차례 폐지론이 대두되면서 위기에 빠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24년간 매주 1시간 방영 약속을 지켜오던 <드라마시티>였다. 시청률이 낮다 보니 자연히 광고 수익까지 바닥을 쳤지만, KBS는 ‘공영방송’답게 명맥을 이어왔다. 그 ‘공영방송’이란 꼬리표는 KBS를 명예롭게 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반면 당장의 수익 앞에서 끝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한 것이었다. 때문에 이번 <드라마시티> 폐지가 다름 아닌 ‘공영방송’ KBS가 내린 결정이란 사실은, 큰 충격과 함께 배신감을 안겨줬다. 이에 PD협회와 작가협회가 즉각 반발했고, 드라마 작가 57명이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인터넷에서는 폐지 반대를 위한 네티즌들의 서명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드라마시티>의 폐지 원인은 (당연하게도!) 수익구조 악화라고 한다. 한 회 분량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1억 원 가까이 되는 반면, 광고 수익은 제작비의 3분의 1도 안 된다는 것. 당장의 수익으로 따져보자면, 계산기를 백 번 두드려봐야 결과는 똑같다. 하지만 이는 드라마가 지닌 장기적인 부가가치를 무시한 논리다. 트렌드에 민감한 예능 프로그램에 비해, 드라마는 해외수출이나 부가산업 등에 있어서 훨씬 자유로운 편이다. 속칭 ‘순수미술’ ‘순수문학’ ‘기초체력’ 등에 비유되는 단막극이라면, 사정은 더 달라진다. 단막극은 꾸준히 미래의 드라마인들을 양성해왔고, 미니시리즈나 대하사극에서 볼 수 없었던 실험정신을 좇았다. 이는 시청률의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가 57명이 낸 성명서는 <드라마시티> 폐지 결정을 두고 “씨앗은 뿌리지 않고 수확만을 거두겠다는 투기적 논리”라고 비난했다. KBS가 단막극의 미래지향적인 부분을 간과했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방송사가 ‘투기적 논리’를 내세우게 된 배경은 분명 있다. 그건 드라마 산업의 지형이 외주 제작사 쪽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공중파 드라마 대다수를 외주 제작사가 만드는 상황에서, 단막극은 거의 유일하게 방송사의 자본과 인력으로 만들어온 것이었다. 여기서 외주 제작사들이 살벌하게 경쟁하며 만드는 것은, ‘재미있는 드라마’ 더 나아가 ‘돈 되는 드라마’다.

당장의 경제적 잣대로만 보자면, 수익도 못 내는 단막극이 천대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적어도 공영방송 KBS라면, 아무런 해결책 제시 없이 무작정 폐지부터 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오히려 ‘단막극 쿼터’ 같은 시스템 제안에 앞장서야 했다. <드라마시티> 폐지의 문제점은, 24년 역사의 프로그램이 없어졌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것―실험정신과 인재 발굴의 역할―을 대체할 만한 그 어떤 대안도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장르에는 존재 이유가 있다

현재 한국 드라마는 양적으로는 충분히 성장했다. 공중파 3사만 보더라도 지금 20편이 넘는 드라마들이 방영되고 있고, 드라마 제작의 움직임은 케이블 자체 드라마로까지 확산됐다. 아직은 과도기 상태지만 시즌제 드라마도 서서히 정착하고 있다. <드라마시티> 폐지 결정과 맞물려, MBC에서는 <베스트극장>을 부활시킬 것이라는 소식마저 들린다. 하지만 아직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한 번 사장된 것은 쉽게 되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한 장르가 멸종되면 ‘다양화’의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단막극이 사라진 현재, 공중파에는 비슷한 구도의 미니시리즈나 50부작 이상의 대하사극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단막극’을 통해 등용문을 찾았던 신인 작가와 PD들은, 새로운 대체 창구를 찾느라 갈팡질팡하는 중이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드라마시티>의 폐지를 두고 단순히 ‘추억을 박탈당했다’는 식의 감정적인 반론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한 장르의 멸종은 앞서 사라졌던 장르들을 떠올리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언제부턴가 한국에선 자취를 감춰버린 어린이 드라마와 청소년 드라마, 더 나아가 대학생 드라마. 드라마의 소비 세대가 바뀌었고 드라마 바깥의 환경이 급변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드라마를 ‘경제논리’로 바라보는 시선은 이 장르들의 멸종에도 한몫 했던 것이다. 모든 장르에는 분명 존재 이유가 있다. 하지만 어린이 드라마와 청소년 드라마와 대학생 드라마가 자취를 감춘 지금, 단막극까지 완전히 멸종돼버린다면? 그 다음에는 대체 무엇이 사라질까? 좀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생각해보자. 단막극의 폐지는 어쩌면 도미노 현상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미디어미래> 2008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