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rtpolio/cynicaly

연애백치의 연애학개론 - 가난한 사랑의 노래 <룸바>

최근 한 시사주간지의 특집 기사 제목에 눈이 확 꽂혔다. “88만원 세대의 슬픈 사랑” 먹고 살기가 먹고 죽기만큼이나 힘든 세상이 피 끓는 청춘들의 사랑마저 갉아먹는가보다. 잡지를 사서 기사를 읽기 전까진 이런 마음이었다. 글은 신경림 시인의 ‘슬픈 사랑의 노래’로 포문을 열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중략 / 돌아서던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이 얼마나 질기고 흉폭한 놈인지 쥐 털만큼도 모르는 나이에도, 저 독백을 씹어 삼켰을 화자의 뒷모습이 떠올라 국어교과서를 읽다가 울게 만들었던 시다.   


연애엔 돈이 든다. 주머니가 가난하면 연애도 힘들다. 요즘엔 승천하는 물가 탓에 몸을 조금만 움찔해도 1만 원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궁핍한 주머니 상황으로 치자면 ‘88만원 세대’와 어깨를 견줄 ‘120만원 세대’(실업급여 최고 지급액)로써 공감 지수를 100퍼센트 채워놓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공감지수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평소 5만 원 나오던 휴대전화 요금이 8만 원으로 늘어서 “연애를 끊었다”는 20대 여성, 4만원 모텔비에 덜컥 겁이 난다는 20대 남성, 애인과 영화를 보면서도 ‘8천원=알바 3시간’으로 환산한다는 20대 여성이 ‘가난한 사랑’을 한탄했다. 예시는 점입가경. 급기야 사랑은 ‘취업의 적’이고, 시간이 드는 연애보다 감정소모가 적은 섹스 파트너를 둔다는 대목에 이르러선 목구멍 저 깊숙이에서 뜨거운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난 “그 사람 얼굴만 봐도 배고픈 줄 모르겠다”거나 “그가 죽으면 나도 죽어요” 식의 배부른 사랑타령엔 “세 끼만 굶겨보라”는 독한 조언을 남기는 ‘언년이’ 체질이다. 나도 연애가 밥 안 먹여 준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그들의 ‘슬픈 사랑’엔 도무지 동조할 수 없었다. 경제적 생존이 최우선시 되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청춘의 뜨거움을 앗아갔다는 사회적 분석도 앙상하게 읽혔다. 최근 유행하는 초식남이 “비용대비 효과를 생각해서 감정 노동을 피하고,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아와 관계를 저울질하다 자아로 기울어진 합리적 선택”이란 주장도 의아했다. 자아는 관계와 저울질해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 아니던가? 현재 17만 원의 통장 잔고가 전부인 주제에 “그래도 사람이 연애를 하고 살아야지!”라고 주장하고픈 나는 과연 무뇌아인가? 괴이한 자괴감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준 건 프랑스 영화 <룸바>였다.

<룸바>는 웃음을 잃은 사람들의 코미디이자 춤을 출 수 없는 댄서들의 춤 영화이다. 동시에 모든 것을 빼앗긴 부부의 사랑이야기다.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피오나(피오나 고든)와 체육교사인 돔(도미니크 아벨)은 동네에서 소문난 잉꼬부부. 틈만 나면 눈 맞춤과 입맞춤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이들은 ‘사랑의 춤’ 룸바에 반쯤 미친 부부 댄서이기도 하다. 동네 룸바 경연대회 우승을 목표로 맹연습을 하던 이들은 꿈에 그리던 트로피를 손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살하려는 남자를 피하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그들인 이 사고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잃는다. 로맨티스트 돔의 기억과 열정적인 댄서 피오나의 한 쪽 다리.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운명은 막무가내 불법 추심원처럼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들만 매몰차게 빼앗아 달아난다.

스토리만 얼핏 들으면 지독하게 비극적이지만 <룸바>는 아름다운 코미디 영화다.  ‘각진 모딜리아니 그림’을 연상시키는 무표정한 긴 얼굴과 더 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움직일 때마다 차마 웃지 않곤 못 배긴다. 인상파 화가들의 화폭을 닮은 강렬한 원색대비의 화면도 인상적이다. <룸바>가 2008년 프랑스에서 개봉했을 때, 평단은 프랑스 희극영화계의 대부 자크 타티 감독의 영화를 떠올렸다. 강압적인 환경과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주인공의 고군분투가 웃음과 연민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데다, 시퀀스마다 짧은 꽁트를 보는 것 같은 주인공들이 펼치는 침묵과 무표정의 슬랩스틱이 그랬다. 주인공들의 어처구니없는 비극 앞에서도 웃으며 그들의 해피엔딩을 응원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고난을 ‘이기는’ 사람들이 아니라 ‘견디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고난이 끝났기에 웃는 사람은 없다. 고난이 끝날 때까지 웃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해주는 <룸바>는 웃음 뒤에 긴 여운을 남긴다. 


사랑의 기억을 잃은 남자와 춤 출 다리를 잃은 여자. 그들이 ‘사랑의 춤’ 룸바를 추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기어이 룸바를 춘다.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사고 후 좌절한 채 등을 돌리고 앉았던 두 사람의 그림자가 흰 벽을 무대로 룸바를 추는 장면이다. ‘룸바’를 출 때 필요한 건 기억이나 다리가 아니다. 함께 춤을 출 상대다. 제 아무리 최고의 실력을 갖춘 댄서라도 혼자선 결코 룸바를 출 수 없다.

앞서 ‘88만원 세대’의 고단한 삶 때문에 연애를 할 수 없다는 청춘들은 취업을 위해 필요한 스펙을 쌓고, 사회적으로 든든한 직장을 얻고, 여유로운 데이트를 위한 돈을 벌기위해 “지금은 연애에 감정을 소비할 여력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건 마치 룸바를 추겠다고 춤 교본을 잔뜩 싸들고 홀로 암자에 들어가는 격이다. 제아무리 비싼 댄스복과 최고의 스탭 실력이 있어도 함께 춤을 출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최고의 룸바를 추고 싶다면 먼저 최고의 파트너를 찾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연애도 당연히 그렇다. “돈이 없어서 연애를 못 한다”고 말하기 전에, 연애에 최고의 파트너를 찾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

연애 카운슬러로 한 마디 하자면, 핸드폰 요금 3만 원 때문에 이별이 고민된다면 당장 헤어지는 게 맞다. 하지만 이건 거창하게 ‘88만 원 세대’를 거론할 문제는 아니다. 그냥 그 사람을 별로 안 좋아 하는 거다. 마지막으로 주머니 사정도 빡빡한데 연애 상대에게 마음을 쓰는 ‘감정 노동’ ‘감정 소비’가 버거워 이별을 결심했다면, 부탁하건데 ‘가난한 사랑의 노래’를 읽으며 울지 마라. 시가 화낼라. 가난한 주머니로는 연애가 힘들다. 하지만 가난한 심장으론 연애가 불가능하다.


<SCREEN> 2009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