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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꼭 봐야할 영화 50



01. 킹콩

피터 잭슨의 <킹콩>에 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가슴을 두들기며 포효하는 ‘괴물’은 없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안타까운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스러지는 ‘궁극의 로맨티스트’가 있을 뿐이다. 시가와 위스키 대신 공룡 턱을 찢으며 여가생활을 보내는 이 거대한 영장류는 모든 남성들이 한번쯤 꿈꿨을 ‘강한 남자’의 모든 걸 보여준다. 위험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주는 강한 힘, 거칠고 무뚝뚝한 겉모습에 감춰둔 지고지순한 순정, 심지어 결투 뒤 홀로 상처를 치유하는 고독한 뒷모습까지. 게다가 사랑에 있어선 머리를 굴리지도,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피터 잭슨 감독도 영화 속 대사를 통해 쐐기를 박는다. “남자들은 머리를 쓰느라 말을 못하지. 사랑에 머리가 무슨 필요가 있어. 그냥 말로 하면 될 것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연인과 함께 지는 해를 바라보던 킹콩은 말한다. 아름답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가슴을 퉁퉁 두들기는 그 사랑스러운 ‘몸의 말’을 듣고 있자면, 뒤늦게 달려와 “내가 구해줄게”라며 버벅거리는 애드리언 브로디가 그토록 ‘하찮게’ 보일 수가 없다. 남자로 태어나, 가슴을 울리는 진한 사랑 한 번 하고자 마음먹었다면, 롤모델은 킹콩이다. 


02.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 해외평론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고 “곤충학자의 리포트 같다”고 했다. 너무나도 완벽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돋보기는 언제나 평범한(?) 남자들에게 향해있다. 최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선 ‘구경남’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술 한다’는 영화감독이 관찰 대상이다. 꽤 근사한 예술가로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이리저리 수를 쓰는 그를 ‘구경’하고 있노라면,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다. 영화를 함께 보며 실컷 킬킬거린 남자 후배는 타박하지도 않았는데, 극장을 나오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저렇게까지 찌질하진 않다고요~!” 후배의 항변도 일리는 있다. 자신의 ‘찌질함’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단속하며 사는 게 인생이다. 하지만 자신의 ‘찌질함’과 대면했을 때, 인정할 줄도 알아야 ‘어른’이다. 마치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겼던 지난밤을 복기하는 것처럼 화끈거리고 민망할지라도, 홍상수 감독의 ‘찌질남 관찰기’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 알아야 반성하고, 반성해야 성숙해질 수 있으므로. 게다가 감독의 애정이 담뿍 담긴 그 소심한 움찔거림을 보고 있자면, 귀엽기도 하다.


03. 4개월, 3주…그리고 2일

사실 2007년 칸국제영화제의 스포트라이트는 ‘칸의 여왕’ 전도연이 아니라, 루마니아 출신의 신인감독 크리스티안 문주에게 쏟아졌다. 칸 영화제가 ‘동유럽 예우차원’에서 초청한 줄로만 알았던 신인감독의 작품은 압도적으로 훌륭했다.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집권하던 암울한 시대와 한 여대생의 개인사를 직조하는 감독의 솜씨도 놀라웠다. 억압적인 사회는 그저 ‘사실적’으로 보여주기만 해도 기가 막혀 웃을 수밖에 없는 블랙코미디이자 등골 오싹한 스릴러가 된다는, 가슴 아픈 사실도 확인했다. 영화 자체도 훌륭하지만 이 영화를 남자들이 꼭 봐야하는 이유는 암호와도 같은 제목에 숨어있다.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두 어린 여인이 두려움과 죄책감에 몸서리 쳤을 특별한 시간을 의미한다. 당시는 인구증가정책의 일환으로 여성의 임신중절이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했던 시대. 이쯤이면 눈치 챘을 것이다. 천진한 만큼 무지한 어린 그녀들이 목숨을 건 불법 임신중절 수술을 하기까지의 임신기한이다. 영화는 그녀들의 공포를 관객의 심장에 내리꽂으며 함께 몸서리치게 만든다. ‘내 여자의 공포’를 직시하는 경험. 남자라면 한번쯤 동참하길 권한다. 진심으로. 제발 좀! 
 



04. 그랜 토리노

사냥터에서 잔뼈가 굵은 늙은 사냥개는 함부로 짖지도, 물지도 않는다. 단지 미간을 찌푸리며 으르렁대는 것만으로 하룻강아지들을 줄행랑치게 만든다. 하지만 늙어버린 사냥개에게 허락된 곳은 기껏해야 볕 좋은 현관문 앞이다. <그랜 토리노>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꼭 그렇다. 한국전쟁에서 지옥의 아수라장을 겪고 살아남은 그는 사랑했던 아내마저 세상을 뜨자 영혼의 상처를 외로운 침묵으로 덮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지켜줘야 할 약자들을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다. 그것이 진정한 마초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다. 진정한 마초는 제 입으로 '남자다움'을 떠벌리는 '찌질이'들과는 격이 다르다. 그들은 약자 앞에서 신사답고, 강자 앞에서 의연하다. 또한 여자에겐 안길 수 있는 품을, 남자에겐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준다. 그리고 언제나 모든 짐을 홀로 지고 떠나는 외로운 구도자다. <그랜 토리노>에서 마지막 결투에 나서는 늙고 외로운 총잡이의 뒷모습은, 득도한 구도자처럼 보인다. 낯간지러운 감사인사 따윈 사양한 채, 그는 적들을 소탕하고 말없이 떠난다. 젊은 시절 ‘황야의 건맨’시절에도 그러했듯이. 진정한 마초는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되면 현자(賢者)가 되는 가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를 증명한다. 청년일 때나, 노인일 때나 그를 동경하는 건 남자들의 ‘의무’다.  


05. 천녀유혼

1987년, 대한민국의 많은 청소년들은 한 여자에게 반해 밤잠을 설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 지인은 그녀 때문에 꼬박 사흘을 앓았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진짜 상사병이었다. <천녀유혼>의 왕조현이 일으킨 ‘집단 첫사랑’ 신드롬. 판타지 호러 멜로라는 신종 장르도 특별했지만, 특별한 건 왕조현 그 자체였다. 청초한 듯 앙칼지고, 그러면서도 백치미가 흐르는 ‘처녀귀신’이라니! 홍콩영화의 ‘화양연화’시절, 쌍권총을 날리며 성냥개비를 씹던 ‘국민 따꺼’ 주윤발이 남자들의 ‘의리’를 일깨웠다면, 왕조현은 소년들의 ‘몽정기’를 점령했다. 여자인 내 꿈에도 왕조현이 나왔을 정도니, 말 다했다. 일설에 의하면, 전설의 수중키스 신에서 앞섶을 풀어헤친 그녀를 자세히 보겠다고 그 부분만 반복 재생하는 통에, 끊어진 비디오테이프가 한 둘이 아니라고 한다. 천천히 돌려보면 뭐라도 보일까봐, 콩닥대는 가슴을 안고 TV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던 그 시절. <천녀유혼>을 재생시키면 언제든 풋풋하고 순수했던 ‘몽정기’로 돌아갈 수 있다.


06. 말할 수 없는 비밀

소녀들이 ‘하이틴 로맨스’를 돌려보며 ‘백마 탄 왕자님’ 판타지를 키울 때, 소년들은 ‘빨간 책’을 돌려보며 ‘가슴이 수박만한 금발미녀’ 판타지를 키운다. 본능적으로 여자는 ‘로맨스’를 남자는 ‘섹스’를 갈망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년들이 <말할 수 없는 비밀> 류의 영화를 볼 기회가 많았다면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여자관객들은 소녀시절 질리도록 읽었던 ‘하이틴 로맨스’의 소년 버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유치하다고 평하는 반면, “예상 외로 굉장히 좋았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남성관객이 많다는 점이 신기했다. 찬찬히 생각하면 안쓰럽고 슬픈 현실이다. 한국의 소년들에게 유려한 피아노 연주로 첫사랑과 교감을 나누는 소년, 우울한 아들을 달래려 함께 탱고를 추는 아버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판타지’였을 것이다. 자고로 주먹 세고, 이빨 세고, 정력이 세야 ‘강한 남자’라는 기괴한 룰이 존재하는 폭력적인 한국사회. 그 속에서 소년들의 감수성은 싹을 틔워보지도 못하고 말라죽은 건지도 모른다. 한국의 소년들에게도 ‘하이틴 로맨스’를 허하라!



07. 포르노그래픽 어페어

당당한 제목에 홀려 영화를 본 남자관객이라면 영화가 시작된지 10분 만에 포르노와 전혀 관계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았다'며 땅을 쳤겠지만, <포르노그래픽 어페어>는 여러모로 남성관객에게 ‘깨달음’을 남길 영화다. 성적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해 ‘섹스파트너 모집‘ 광고를 낸 여자와 그녀의 특별한 계획에 동참한 남자. '묻지마 섹스' 시작된 관계는 점점 '설레는 데이트'로 변질(?)되고, 두 사람은 상대의 육체가 아닌 감정을 궁금해 하기 시작한 다. 우리는 종종 “사랑은 이타적”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섹스든 사랑이든 본질적으로 나를 충족시키려는 이기심에서 출발한다. 어줍지 않게 상대의 마음을 짐작하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위한 선택'이라는 자기최면에 빠져 사랑을 잃는다. 운명이라면 반드시 이어졌을 거란 상상은 '변명'일 뿐이다. 발견했을 때 잡아두지 않으면, 사랑은 매몰차게도 흘러가버린다. 만약 예상치 못한 하룻밤을 보내고, 새로운 감정에 당황한 나머지 어정쩡하게 상대를 떠나보낸 아쉬운 경험이 있다면, 재발방지 차원에서라도 챙겨보면 좋겠다. 


08. 침대에서(인 베드)

‘15세 관람가’용 멜로를 대체 무슨 맛으로 보느냐고 투덜거렸던 남성관객이라면 이 ‘진득한’ 칠레산 멜로가 입맛에 맞을 것이다. 영화는 제목처럼 일단 격렬한 교성과 리드미컬한 움직임이 난무하는 ‘베드신’으로 시작된다. 파티에서 눈이 맞아, 이름도 성도 묻지 않고, 일단 침대로 몸을 날렸던 두 남녀는 격정적인 정사를 마치고 담배 한 모금을 나누며 말문을 연다.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남남으로 돌아갈 ‘부담 없는’ 관계이기에, 가장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의 취향을 알리고, 가치관을 토론하고, 서로의 옛사랑에게 은근한 질투를 드러낸다. 어리광과 분노를 표출하며 숨겨뒀던 상처를 털어놓으며 그들은 점점 섹스가 아닌 사랑을 나누는 ‘진짜 연인’으로 발전한다. 10년보다 깊은 하룻밤의 사랑. 총 네 번의 베드신은 ‘섹스’가 감정을 담은 ‘메이크 러브’로 변화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연애에는 격정적인 섹스보다 말없는 포옹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사실도 일러준다. “섹스가 섹스지, 메이크 러브는 무슨!”이라 우기는 남성이라도, 그 차이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09. 이스턴 프라미시스

액션은 ‘현실’을 동경한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아무리 와이어를 감쪽같이 지워도,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허풍 액션’은 싱겁기만 하다. 최첨단 장비의 힘을 과시하던 ‘제임스 본드’마저 ‘생계형 스파이’ 제이슨 본을 따라 구르고 뛰는 요즘이 아니던가. 하지만 머리와 근육 사이의 거리는 꽤 멀다. ‘리얼 액션’을 표방하는 영화들은 몸 쓰기에 급급한 나머지 이야기가 앙상하고, 이야기가 탄탄하면 아무래도 ‘액션’이 성에 안찬다. 하지만 <이스턴 프라미시스>는 머리와 근육, 심지어 심장까지 움직이는 걸작이다. 악에 맞서기 위해 악을 받아들인 남자가 맨 몸으로 벌이는 날것 그대로의 혈투는 잔혹의 경지를 넘어 숭고하기까지 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과 만났을 때, 가장 빛나는 배우 비고 모텐슨이 창조한 ‘악한 선자(善者)’의 표정 없는 혈투를 놓치는 건, 액션영화 관객으로서 불행한 일이다.


10. 나인 하프 위크
개봉한지 20년도 지난, 케케묵은 ‘에로틱 멜로’가 무슨 감흥을 줄 수 있겠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고전은 시간이 흘러 다시 볼 때마다 새로운 떨림을 준다. 만약 <나인 하프 위크>를 여드름 숭숭 난 까까머리 중고딩 때, 몰래 숨어 본 기억이 전부라면 “영화를 봤다”고 말을 하지 말자. 이 농염한 에로틱 멜로의 고전은 피 끓는 ‘청소년’이 제대로 소화시킬 만한 수준이 아니다. 최소한 20대 후반이 지나야,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끝이 저릿저릿한 ‘애무’의 성찬을 만끽할 수 있다. 희대의 섹스심벌 킴 베이싱어와 미키 루크의 찬란한 시절이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비애를 불러일으키지만, 어쩔 수 없는 일. 팁을 제공하자면, 남성들은 어두운 골목의 섹스 신을 최고로 치고, 여자들은 냉장고 애무 신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인용구’가 먹힌다는 점도 고전의 특성임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Esquire> 2009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