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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길, 깊고 고요한 열정


[선덕여왕]의 ‘비담’이 시청자들을 휘어잡을 무렵, 김남길은 또 한 편의 영화를 찍고 있었다. [피터팬의 공식]의 조창호 감독이 연출한 멜로 영화 [폭풍전야]. 비담이 운명에 휘말리며 변화해가는 ‘아나킨 스카이워커’ 같은 존재였다면, [폭풍전야]의 ‘수인’을 통해서는 고요함 속에 격정을 품은 김남길을 만날 수 있다.

PROLOGUE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김남길의 배우 인생에서 [선덕여왕](2009, MBC)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제작진이 결정적인 ‘히든카드’로 내세운 ‘비담’이란 캐릭터는, 뜻밖에도 인기 스타가 아닌 ‘김남길’이란 다소 생소한 이름의 배우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김남길은 ‘비담’을 거치면서 연기력을 다시 증명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인지도까지 얻었다. 최근에는 [아마존의 눈물](2010, MBC) 내레이션을 통해 ‘명품 목소리’가 회자되기도 했다. 이제 김남길은 열혈 팬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누구라도 알아보는 ‘전국구 스타’가 됐다. 그 와중에 김남길은 “상업성이 뚜렷한 장르 영화에 출연할 것”이란 사람들의 기대를 깨고, [폭풍전야](2010)란 저예산 작품을 선택했다. 이는 그가 유명세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선택이다. [폭풍전야]에서 김남길이 맡은 캐릭터는 ‘수인’이란 남자. 고통스러운 수감생활 끝에 결국 탈출하고, 치명적인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이다. 늘 자신의 경험을 극대화해 캐릭터를 만들어간다는 김남길. 이번에는 어떻게 ‘수인’이란 인물을 창조해냈을까? 빡빡한 스케줄과 지독한 체중 감량으로 부쩍 수척해진 김남길을 만나, 그의 속내를 들어보았다.

비담 이후, 달라진 건 없지만 배운 건 있다

우연히 [아마존의 눈물] 극장판과 [폭풍전야]가 한 주 텀으로 개봉하는군요.
(웃음) 뭐, 그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어떤 상업적인 부분을 알린다기보다, 저에게는 따로 따로 다 의미가 있는 작품들이에요. 잘 되어야 할 텐데….(웃음)

[아마존의 눈물] 내레이션을 하고 나서 MBC [세계와 나 W]의 아이티 지진 방송 내레이션을 했고, 또 ‘수마트라 지진 그 후 100일’ 편에는 직접 인도네시아에서 구호활동을 펼치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이후 네티즌 사이에서 “MBC 교양국이 김남길을 접수했다” “김남길은 MBC 노예다”란 우스갯소리가 떠돌더라고요.(웃음)
원래 환경이나 유기견들 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북극의 눈물]도 굉장히 안타까워하면서 봤죠. [아마존의 눈물]도 그런 관심사의 연장선에 있었어요. 하지만 제 전문적인 분야가 아니라서, 배우 입장에서 다른 분야에 월권행사를 하고 싶진 않았어요. 다만 제작진이 아마존에 가서 고생한 것에 누가 되지 않는 한에서, 내가 가진 장점들을 최대한 살려 도와드리고 싶었죠. 그런 취지에서 내레이션에 참여하게 된 거예요.

봉사활동의 경우, 아무리 순수한 관심사에서 출발했다 해도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라 마냥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저는 그렇게 될 줄 몰랐어요. 아직 그런 것에 익숙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사실 [W] PD님한테 카메라 들이대지 말라고 하면서, 많이 싸웠어요. 저는 그동안 연예인들이 외국에 나가서 봉사하는 걸 별로 탐탁지 않아 했어요. 정말 꾸준히 봉사하는 분들도 있지만, 이미지 마케팅이나 이벤트성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내가 해외에 봉사하러 나가는 것 자체가 좀 불편했었는데, 그때 PD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선덕여왕]의 비담으로 주목받고 있을 때 이곳의 어려움을 전달한다면, 좀더 큰 파급력을 갖고 동참을 끌어낼 수 있지 않겠냐”고. 대신 저는 설정 없이 메이크업도 안 하고 조용히 담아왔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죠.

아무래도 비담 이전과 이후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대중적인 인지도나, 거기에 대처하는 자세 면에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주위 반응이 확연히 달라진 건 사실인데, 개인적으로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주변에서 얘기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그런 것에 붕 떠서 흔들릴 나이도 아니고. 이제까지 인기에 연연해하면서 연기해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담담하지 않았나 싶어요. 사실 대중의 인지도는 이미 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2005, MBC)와 [연인](2006~2007, SBS)으로 겪어봤어요. 연인 사이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어차피 눈에서 안 보이면 멀어지게 돼있어요.(웃음) 다만 나를 봐주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작품에 소홀하지 말아야겠다는 책임감은 생겼죠. 대중들의 변덕스런 취향에 다 맞춰서 작품을 고르진 않겠지만, 그런 부분을 또 배제할 수는 없겠더라고요. 그리고 아무래도 [선덕여왕] 이후에 [폭풍전야] 제작이 들어갔더라면 지금보다 더 수월한 제작이 되지 않았을까요.  나로 인해서 작은 영화가 좀더 활성화되지 않았을까, 그런 기대를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배우의 인지도가 높아지면 그만큼 책임감, 부담감이 커진다는 말인가요?
그렇죠.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더 모범적으로 되어야 하는 부분들도 분명 있을 테고요. 그래서 말이나 행동이 더 조심스러워야 하고. 사람이 실수를 안 하면서 살 수는 없겠지만, 지금 최대한 실수를 안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딱히 불편한 점은 없나요?
저는 지금도 평상시처럼 추리닝 입고 모자 눌러쓰고 다녀요. 그런데 뭐랄까, 불편하다기보다 이제는 그냥 마음 놓고 예전처럼 다니긴 힘들겠구나 싶어요. 나는 더 가까워지고 친숙해지고 싶은데, 오히려 나로 인해서 주위 사람들이 불편해지는 느낌은 있더라고요. 그런 것 때문에 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선덕여왕] 이후 김남길 씨에 대한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기사에서 ‘차세대 루키’라는 표현을 써서 좀 웃은 적이 있는데….(웃음) 또 어떤 기사에서는 ‘데뷔 10년차 배우’라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금 배우로서 어떤 단계까지 왔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몇 년 내내 ‘루키’로 불렸어요.(웃음) 지금은 어떤 준비를 마치고 출발선에 있는 단계? 일단 출발선에는 잘 섰는데, 그 이후 얼마만큼 뛰어나갈 수 있는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라 생각해요. 지금 군대 문제가 남아있는데, 공익 근무를 하는 동안이 저에게는 정말 중요한 시간이 될 거예요. 그 기간 동안 얼마나 깊어져서 성숙해지느냐에 따라 앞으로가 결정되겠죠.

아픈 캐릭터들에 마음이 간다

[폭풍전야]의 ‘수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체중 감량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본인의 생각이었나요?
시나리오에 ‘아파서 살이 빠지는’ 설정이 일부 나와 있었어요. 저 역시 욕심이 나서 더 많은 걸 보여주고 싶었고, 감독님 역시 본인 작품이니 그러길 원했고. 촬영하면서 먹는 걸 참는 게 힘들었는데, 살을 뺀 부분이 영화적으로 다 표현이 안 되어서 아쉽긴 해요. 그래도 어쨌든 영화라는 게 한 만큼 다 표현될 수는 없는 거니까요.

[후회하지 않아](2006) 때도 살을 많이 뺐잖아요. 모든 배우들이 다 그렇겠지만, 김남길 씨는 유독 고생이 아니라 고행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제가 작품마다 그런 복이 타고났나 봐요.(웃음) 그런데 그게 복이라면 또 복이라고 생각해요. 저 스스로도 쉽게 가지 않는 것들에 자꾸 손이 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가 그런 걸 원하니까 그런가 봐요.

앞으로 감독들 사이에서는 김남길 하면, 감독의 주문대로 다 해내는 배우로 인식되겠어요.
저뿐만 아니라 어떤 배우도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과정일 거예요. 저보다 더 독한 사람도 많더라고요. 저는 다만 프로의 마인드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것뿐이죠.

영화를 보면서, [폭풍전야]는 시나리오 자체가 여백이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선덕여왕]의 비담 같은 경우 [슬램덩크]나 [배가본드] 같은 만화를 참고해서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어디에도 레퍼런스가 없었을 텐데요. 그래서 더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거라 봅니다.
저는 연기할 때 개인적인 경험을 극대화해서 표현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 ‘수인’은 저와 동떨어진 인물이라고 하긴 어려워요. 저 역시 사랑에 열정적이고 운명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폭풍전야]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사랑을 찾아나가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절망 가운데서 조금씩 능동적인 감정을 찾아가는 영화들을 많이 찾아보고 고민했어요. 무엇보다 조창호 감독님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라, 감독님이 갖고 있는 감정 혹은 로망에 대해 많이 들었죠.

조창호 감독의 전작 [피터팬의 공식]은 봤나요?
아, 원래 제가 그 작품으로 감독님과 인연을 맺을 뻔하다가, 어떤 사정 때문에 못했어요. 이번이 4년 만의 만남인가? 감독님 스스로도 이번에는 [피터팬의 공식]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셨어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번 언론시사 무대인사에서 스스로 “대한민국에서 베드 신을 많이 찍는 배우로 꼽히지 않을까”라고 언급했는데요. [미인도](2008)에 이어, 이번 영화에도 베드 신이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베드 신이 회자되는 것이 신경 쓰이나요?
시나리오가 좋아서 읽다 보면 베드 신이 꼭 들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베드 신이 신경 쓰인다고 해서 좋은 시나리오를 배제할 수는 없잖아요. 베드 신 자체가 감정 신이니까요. 이번에는 이제까지 보여준 베드 신과는 차별성을 두고 싶었어요. 그래서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베드 신이 아니라, 정해진 앵글 안에서 표정으로 보여줄 수 있는 베드 신을 만들어보자고 했어요. 그게 얼마만큼 전달력을 가질지는 관객들이 판단할 몫이지만요. 영화에 꼭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크게 걱정은 안 하는데, 이제는 조금씩 노출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같네요.(웃음)

[굿바이 솔로](2006, KBS)나 [후회하지 않아] 이후 필모그래피를 보면, 김남길 씨의 개인적 취향이 확연히 묻어나는 것 같아요. 본인이 ‘꽂히는’ 작품들은 정확히 어떤 것들인가요?
아픔을 가진 캐릭터들에 끌리는 것 같아요. 그 아픔이 현재진행형인 캐릭터도 있고, 미래에 아픔이 닥칠 캐릭터들도 있겠죠. 어떤 밝은 역할도 아픔이 없는 캐릭터는 없잖아요. ‘저건 말도 안 돼’라고 생각될 수도 있는 캐릭터들도 함께 공감하면서 아파할 여지는 있다고 봐요. 앞으로 저 자신이 좀더 편해지면 편안한 역할을 맡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유난히 아픔의 원인들이 분명한 캐릭터들에 손길이 가는 것 같아요.

배우로 사는 것… 행복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좀 뻔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왜 연기를 하고 싶었나요?

원래 저는 방송보다 공연예술에 미쳐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리어왕]을 보고, 살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것을 경험했어요. 배우가 무대 위에서 감정을 전달하고, 또 관객들이 그 감정을 전달받아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나도 배우가 되어 무대 위에서 뭔가를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무작정 대학로에 나가 주전자 나르고, 세트 만드는 법부터 배웠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이래저래 좋은 선배들을 많이 만났어요. 제가 원래 끈기가 없는데,(웃음) 연기할 때만큼은 싫증을 안 내고 꾸준히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조금 배고프긴 하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다 보니 지금까지 왔네요. 심리적으로 흔들릴 때 좋은 선배들이 곁에서 더 확고하게 해준 게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MBC 공채로 본격적인 방송 생활을 시작했고, 2004~2005년에는 단막극에서 단역을 꽤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명생활인 거죠. 그 시절을 어떤 마음으로 보냈나요.
“아니꼬우면 뜨라”고 해서.(웃음) 농담이고요. 인지도나 상업성을 완전히 배제했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그때부터 이미 아이돌 스타가 되길 바란다기보다, 길게 배우로 갈 것을 고민했던 것 같아요. 더구나 고맙게도 주변에 정재영·설경구·박해일·김혜수 선배 같은 좋은 사람들이 다잡아주고 가르쳐줬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갈 수 있었어요. 물론 집안에 금전적인 보탬이 못 된 점에서는 가족들에게 미안해요. 사실 [미인도] 끝나고 나서 개런티를 꽤 많이 준다는 작품들도 들어왔는데, 제가 정말 하고 싶어서 선택한 영화가 [폭풍전야]거든요. 장남으로서 내 선택이 가족들에게는 굉장히 이기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부모님들이 그런 것에 왈가왈부하실 분들도 아니고. 제 선택을 믿고 의지해주셨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잘 보냈던 것 같아요.

[후회하지 않아] 때 김남길 씨를 인터뷰했던 어느 기자가 그러더군요. 한눈에도 이 사람은 뭐가 되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뭐,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요.(웃음) 그 영화가 스크린 데뷔작이었는데, 당시에 자신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는지요.
(웃음) 가능성이라기보다, 나 자신과 싸워서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용기는 갖고 있었어요. 내가 이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던 시기였거든요. 그런 고민은 어떤 작품이든 따라와요. 사람들의 평가는 작품이 완성되고 나서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그 순간만큼은 ‘이 인물을 어떻게 표현할까, 이 작품에서 어떤 이야기를 많이 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누구나 이 작품이 잘될 것인가 고민하겠지만, 저는 아직 그런 쪽에 통찰력이 많이 약한가 봐요.

언제쯤 그 통찰력을 갖게 될까요?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르지 않을까요? (송)강호 형도 그렇고, (설)경구 형도 그렇고, 본인들도 작품을 하면서 ‘이게 잘 될 것이다’란 확신을 갖고 하는 경우는 드물대요. 잘될 것을 알면서 한다면 죄다 잘된 작품만 하지 않았겠느냐고. 대중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러니 처음부터 대중의 선택을 받으려 하기보다,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대중이 선택하게끔 받쳐주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시청률이나 흥행성적에 관계없이, 유난히 마음이 많이 가는 작품이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굿바이 솔로]는 김남길 씨가 늘 ‘첫사랑’ 같은 작품으로 꼽는 드라마고요.
[굿바이 솔로]의 ‘지안’은 부모가 청각 장애인인 아픔을 갖고 있어요. 드라마에서 “사람들은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이 세상에서 날 이해해줄 수 있는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대사가 있는데, 그런 점에서 ‘지안’은 그 당시 나를 대변해주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으로 연기하는 재미를 가르쳐준 작품이기도 해서, 첫사랑 같은 작품이란 말을 한 거예요. [폭풍전야]의 경우도 개인적으로는 [후회하지 않아]의 느낌이 들어 좋았어요. [후회하지 않아] 때 다른 것 다 따지지 말고 정말 작품 하나 잘 만들어보자고 열정적으로 했는데, 이번에도 똑같아요. 아마 모든 작품들이 그럴걸요. 이제까지 ‘그래, 이것도 한번 해볼까?’ 이런 마음으로 참여한 작품은 하나도 없어요.

[아마존의 눈물]을 보면서, 새삼 김남길 씨의 ‘명품 목소리’를 실감하게 됐어요. 솔직히 스스로도 타고난 기럭지나 목소리, 그런 것들에 대해 부모님에게 감사하죠?(웃음)
(웃음) 감사는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연기 잘하는 배우치고 키 큰 배우 별로 없어요.

그런가요? 키 큰 배우들이 들으면 섭섭해하겠네.(웃음)
아니, 진짜로! 송강호, 설경구, 최민식 선배 등 연기 잘하는 사람 중에 180을 넘는 사람 없잖아요. 물론 타고난 외모로 장점화할 수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연기는 절대 외적인 비주얼로 하는 게 아니거든요. 배우는 연기할 때만 멋있으면 되는데, 굳이 카메라 앞에서 멋있게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연기 잘하는 선배들은 캐릭터에 맞는 외형을 가꿔나갈 뿐, 절대 외형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아요. 물론 부모님에게 감사는 해요. 하지만 장점이라면 농구할 때? 엄마가 선반에 있는 그릇 꺼내달라고 할 때?(웃음) 사실 저 처음 방송국에 공채로 들어왔을 때도, 키가 너무 커서 안 좋다는 소리 들었어요. 여배우들과 투샷 잡을 때 느낌이 안 산다고.

인간 김남길의 인생에서 연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요? 사실 100%라고 하기엔 좀 그렇잖아요.
글쎄요, 80% 정도? 왜냐하면 연기하는 것 자체가 삶이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니까요. 만약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내 열정을 조금 나눠 가질 수는 있겠지만, 제가 또 연기하면서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잘 챙기지 못해요.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어서.(웃음) 어쨌든 연기는 삶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래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 시간이 외롭기도 해요.

외롭다고요?
저는 늘 그래요.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외로워요. 그래서 늘상 하는 말이지만,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는 핑계를 댈 수 있는 직업이 아니잖아요. “이번에는 몸이 힘들어서 연기가 미흡하니 이해해주세요”라고 자막이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웃음) 나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나를 좋게 봐주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외로워지기 시작하는 거죠.

지금 찍고 있는 드라마 [나쁜 남자](SBS)에서는 어떤 김남길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선덕여왕] 이후 바로 드라마를 하는 게 굉장히 위험한 면이 있어요. 제가 이제까지 보여준 캐릭터들을 다 갖고 와서 극대화시킨 게 ‘비담’인데, 어떤 연기를 해도 [선덕여왕]에서 벗어나긴 힘들 거예요. 그런 점에서 [나쁜 남자]는 전작들과 차별화된 작품이라기보다, 제가 이제까지 보여준 부분들을 더 깊이 있게 표현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나쁜 남자라…. 김남길 씨의 매력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제목이네요.(웃음)
저 나쁜 남자 아닌데요????!

어떤 기사에서 이렇게 표현했던데요. ‘버림받아도 연애하고 싶은 남자’라고.(웃음)
헉, 진짜요? 아니, 대체 누가!!(웃음)

EPILOGUE

인터뷰가 끝나고, 김남길은 제주도행 비행기에 타야 한다고 했다. 지난해 이맘때 내내 제주도의 찬바람을 맞으며 촬영에 임했던 그는, 다시 드라마 [나쁜 남자]의 촬영을 위해 제주도로 향해야 했다. 초기 비담의 모습처럼 쾌활하고 편안한 매력은 여전했지만, [선덕여왕] 이후 쉴 새 없는 강행군이 그를 조금 피곤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는 “에너지가 고갈될 때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에 “지금이 딱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고 지친 기색으로 답했다. 하지만 시청자 입장에서 김남길의 [나쁜 남자]가 어떤 모양새로 나올지 기대되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그 스스로 ‘다크한 비담’에서 좀더 깊어진 부분을 보여줄 것이라 슬며시 힌트를 흘렸으니, 한층 업그레이드된 김남길을 기대해도 좋겠다. 이쯤에서 조창호 감독의 말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김남길은 침묵하는 시간에도 열정적인 에너지가 발산되는 배우”라고. 그의 깡마른 몸과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아우라’를 직접 마주하고 나니, 딱 들어맞는 설명이란 생각이 든다. 침묵 속에도 열정을 품은 배우. 그는 김남길이다.

네이버 스페셜 무비 에디션  No.682  2010. 3.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