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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의 젊은 하녀와 늙은 하녀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는 젊은 하녀와 늙은 하녀가 등장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건 젊은 하녀 ‘은이’지만, 늙은 하녀 ‘병식’이 없었다면 이야기의 퍼즐은 맞춰지지 못했을 것이다. 과거 은이처럼 살았을지도 모를, 그리고 은이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를 병식. 그녀를 위한 스핀오프 드라마가 하나 등장해도 좋지 않을까?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녀>를 보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늙은 하녀’ 병식(윤여정)이었다. 병식은 오랫동안 이 집에서 하녀로 일해 왔기에, 아무리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상황이 와도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다. 침묵하는 대신 그녀는 700평짜리 번지르르한 대저택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일들을, 마치 부엉이처럼 지켜볼 뿐이다. 사실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건 젊은 하녀 ‘은이’(전도연)지만, 은이의 캐릭터는 여러 모로 병식이 존재하기에 더욱 재미있어진다. 병식은 어찌 보면 은이와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은이 편에 서서 그녀가 이 저택에서 겪는 일에 대해 근심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병식은 어느 한쪽 편에 서있는 인물이 아니다. 뼛속까지 속물근성으로 가득한 그녀는, 오직 자신의 욕망과 이익에 의해 움직인다. 역시 이 그로테스크한 저택의 하녀답다.

은이와 병식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 세계에 살고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두 사람으로 이분되는 첫 번째 요소, 현실과 비현실. 영화가 시작되면, 식당 일을 하는 은이의 모습이 비춰진다. 은이가 사는 세계는 그녀에게 썩 친절하지는 않더라도, 그저 그런 평범한 곳이다. 은이와 함께 사는 친구가 “내 몸에서 생선비린내가 나지 않니?”라고 말하는 대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적당히 생활의 냄새도 배어있다. 이즈음 병식이 새 하녀의 면접을 보기 은이를 찾아오는데, 고급스럽고 완전무결한 차림의 병식은 어딘가 모르게 상당히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은이가 병식을 따라 도착한 곳, 훈(이정재)과 안주인 해라(서우)가 살고 있는 대저택은 사람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서 은이는 아찔할 정도로 짧은 하녀복을 입고 일하기 시작한다. 박제된 인형 같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현실의 인물 은이가 들어왔다. 당연히 이 저택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변화는 당연히 병식에게도 일어난다.

이상하게도, <하녀>의 대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은이와 병식 둘밖에 보이지 않는다. 온갖 호사스런 것으로 치장했지만, 아무리 봐도 공허한 모델하우스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곳. 이곳에서 은이와 병식은 속물근성 가득한 주인들의 짜증과 어리광을 받아가며 일한다. 병식이 언제나 그랬듯 기계적인 몸짓으로 하녀 일을 하는 반면, 순진한 은이는 이 집안 구석구석이 신기하기만 하다. 해라의 귀여운 딸이나 지나치게 친절한 주인 훈의 유혹마저도. 결국 은이는 주인 훈의 육체 앞에서 완전히 굴복하고 만다. 여기서 은이가 남긴 명대사 “나 이 짓 좋아해요”는 이 여자의 순진함이 결국은 이 집에서 처절하게 이용당할 것임을 암시한다. 은이가 번번이 선을 넘자, 병식은 몇 차례 경고한다. “무서운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잘났나봐.” 그러나 한편으로 병식은 은이와 훈의 비밀을 이용해 이익을 챙길 속셈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던 은이가 이 저택에 들어오면서 함께 비현실적인 인물이 되어간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저택에서 가장 상식적인 인물은 병식이다. 집주인들이 천민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속물 부르주아라면, 은이는 거기에 희생당하는 순진한 프롤레타리아라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 그 사이에서 병식은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를테면 병식은 중간 관리자인 셈인데, 주인들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타협하는 한편, 은이를 걱정한다. 병식은 목욕탕에서 은이의 풋풋한 육체를 보며, 이렇게 묻는다. 나는 계속 하녀 일만 해왔지만, 너는 남자도 많이 따를 것 같은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거냐고. 병식은 이 집안을 훤히 꿰고 있기에, 어쩌면 은이에게 닥칠 비극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내가 다 무서워”라고 어르면서도 “주접떨지 말고 그냥 사라져”라고 일갈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병식의 예상대로, 은이는 주인의 아이를 임신하고 낙태수술을 당하며, 자신을 불태우는 극단적인 복수극으로 끝맺는다. 병식 역시 참다못해 무례하고 철없는 주인들에게 “니들은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니”라고 화끈하게 공격하지만, 짐을 챙겨 집을 나가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순수하지만 마음에 불꽃이 가득했던 은이다운 결말이었고, 노련했지만 생기를 잃어버린 병식다운 마무리였다. 사실 <하녀>에서 병식의 캐릭터가 많이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병식의 캐릭터가 빛날 수 있었던 건 8할이 윤여정의 호연 때문이라 믿고 있지만, 어찌됐든 이 영화에서 가장 해석의 여지가 분분한 캐릭터는 바로 병식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병식은 과거에 은이처럼 살지 않았을까. 그녀도 한때 순진해서, 이 집 주인에게 농락당했던 건 아닐까. 대화 속에 잠깐 드러나는 ‘사법고시를 패스한 병식의 아들’은 어쩌면 이 집과 관련이 있는 존재가 아닐까.

병식은 순진하게 눈망울을 굴리던 은이를 바라보며,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과거에 자신도 그랬기에, 은이가 이용당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병식은 이미 현실에 타협해버린 자신을 변화시킬 기력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하녀>는 결국 은이의 이야기였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병식의 스핀오프 드라마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지 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녀는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지금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일까. 은이에 대한 병식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공허한 대저택만큼이나 공허한 영화를 보면서, 내 기억에 가장 남았던 건 늙은 하녀 병식의 중얼거림이다.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주름 자글자글한 육신을 드러내던 그녀. 술잔을 홀짝거리며 주문을 외듯 끊임없이 내뱉던 그 말. 아더메치, 아더메치, 아더메치.

SCREEN 2010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