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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유효기간은 끝났을까?

디자인의 유효기간은 끝났을까?


올해 밀라노 가구 디자인 페어를 앞두고 뉴욕타임즈의 저널리스트 앨리스 로손이 쓴 기사 첫 머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세상에 새로운 의자가 필요할까? 이치에 맞는 답은 ‘아니오’다. 의자며 테이블이며 램프며, 이미 세계는 수많은 가구로 가득 찼다. 기막히게 혁신적이고 아름다우며 지속 가능하고 쓸모 있지 않다면, 새로운 가구는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 기사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제품 디자인에서 중요한 두 가지 트렌드다. 하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적용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디자인의 윤리적 책임, 환경이나 사회적 이슈에 부응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디자인 학교인 디자인아카데미 아인트호벤이 밀라노 페어에서 연 전시 제목 <?>은 이런 고민에서 나왔는데, 이는 단지 밀라노만의 이야기도 가구 디자인 분야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뉴욕에 있는 쿠퍼휴이트 미술관은 3년마다 디자인전을 여는데, 다음 전시 제목을 <왜 지금 디자인인가>로 잡았다. 디자인계에서 생각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지금 지구가 관심 두는 이슈에 대해 디자인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얼마 전 온라인에서 배포된 <데이비드 리포드> 최신판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데이비드 리포트>는 스웨덴의 디자인 사업가 데이비드 칼슨이 내는 보고서로, 새로운 디자인 트렌드를 문화, 비즈니스 아이디어에 연계해 다룬다. 데이비드 칼슨을 가장 쉽게 소개하자면 앱솔루드와 소니 에릭슨의 브랜드 이미지를 만든 이력을 들 수 있다. 가구 브랜드인 ‘데이비드 디자인’을 만들었으며, 영국 주간지 <옵저버>가 세계 10대 숍으로 선정한 라이프스타일 숍 ‘칼슨 아넬’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데이비드 리포트> 최신판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디자인의 유효 기간이 다 된 것은 아닐까? 솔직해지자. 이제 디자인은 오염의 근원지다. 디자인은 ‘미의 세포증식’ 상태로 퇴보했으며, 디자인의 원래 의미와 가치, 정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파괴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 뒤에 이어지는 예들은 냉정하다. 유럽 곳곳에서 열리는 가구 디자인 페어에서 매년 수천 개의 새 의자가 나오지만, 그 의자들은 이미 잘 알려진 주제를 반복할 뿐이어서 이미 포화된 시장에서 남다르게 드러나지도 못한다. 다른 가구도 주거 환경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존 디자인의 익명성에 묻히려고 시장에 나온다. 하지만 <데이비드 리포트>가 이처럼 냉정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고군분투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우리에게 작년의 의자와 다르지 않은 새 의자가 필요한지 진심으로 생각해보자는 의도다.


디자인이 상품에 브랜드 가치를 더하며 마케팅의 키워드로 부상한 것은 20세기 디자인의 트렌드였다. 하지만 <데이비드 리포트>나 생각 있는 디자이너들은 이제 디자인이 혁신을 이끄는 실험실이 아니라 오히려 오염의 근원지가 되고 있다고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 디자인의 범람이 매일 새로운 것을 바라는 중독 증세를 부추긴다. 자고 일어나면 눈부신 새 제품이 나와 있는데, 어제의 물건 따위에 누가 눈을 돌릴까.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새로운 디자인 제품을 경험하면서 트렌드를 앞서가는 얼리어답터의 타이틀을 얻는다고 자부하는 동안에는, 반짝 사랑받다가 버려진 물건들로 지구가 오염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거나, 기본으로 돌아가서 ‘디자인의 본질적인 역할이 무엇일까’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아이폰이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의 정점에 있다고들 하지만, 왜 아이폰은 매끄럽고 반짝이는 외장을 두르고 있는 것일까? 왜 매일 사용하며 흠집이 생기는 것을 겁내며 추가로 케이스를 구입하게 만든 것일까? 이 디자인은 정말 제품의 쓸모에 가장 적합한 것일까?” <데이비드 리포트>가 던지는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데이비드 리포트>는 지금 제품 디자인이 위기에 처한 것은 경제 위기 탓에 매출이 줄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어떤 제품이든 금세 필요 없는 쓰레기가 되도록 만드는, 변화의 쓰나미 때문에 좋은 디자인의 가치도 상실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디자인된 ‘무엇’에 대한 유행병에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디자인은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내서 지금 당장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며, 오래 가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오래된 가죽 소파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를 더하는 것처럼. 아무리 새로운 디자인 제품이 나와도 매끄러운 새 제품에 대한 만족감은 잠깐 지나갈 뿐이고, 그 뒤에 제품의 인생이란 사용되면서 낡아져가는 과정이다.


그러면 대체 내일이면 쓰레기장으로 직행하는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 디자인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걸까? <데이비드 리포트>는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의 최근 인터뷰를 인용했다. “나는 내 역할이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의 삶에 더 가치를 두게 되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측하기보다, 우리 모두가 속한 현재에서 삶을 더 낫게 만드는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인터뷰는 현재를 산다는 실천에 대한 후카사와 나오토의 관심을 보여준다.


후카사와 나오토와 <데이비드 리포트>가 동의하는 디자인의 본질적인 역할은,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만들고 인간이 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전달해서 우리를 문화적으로 감동시키는 디자인은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맥도널드의 해피밀 장남감은 왜 쉽게 버려지는 걸까? 당연한 일이다. 다만 마케팅의 수단으로 만들어졌을 뿐, 아무런 이야기도 들려주지 않는 해피밀 장난감은 내일이면 버려질 물건의 대표적인 예다.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해서 새로운 가치를 얻기 위해 디자이너들에게 요구하는 자질은, 마치 사회 사업가처럼 사회에 환원한다는 정신을 갖고 그 디자인이 속한 문화 공동체와 손을 잡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실천 방법 중 하나는 지역 장인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이다. 이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이야기들을 담기 위해 유용한 방법이며, 새로운 콘셉트,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하는 아이디어를 얻으며 다양한 문화적 내러티브를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문화와 인간성을 배려하며 독창적인 디자인을 창조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전력 회사 에센트의 새로운 건물을 디자인한 암스테르담의 건축 회사 씨에(De Architekten Cie)는 푸른색 채색을 한 도자기 타일로 건물 외벽을 덮었는데, 그 타일에는 지역 예술가 후고 카그만(Hugo Kaagman)이 그린 스텐실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다.


또한 <데이비드 리포트>가 말하는 좋은 디자인, 21세기의 디자인은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지구의 과제와 닿아 있다. 디자인은 본래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컨텍스트를 생각하지 않고서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는 없다. 이미 시장은 포화 상태를 넘어섰으며, 기본적인 생존 조건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속출하는데, 새롭고 트렌디하다는 이유로 시장이 강요하는 욕망에 휩쓸려 디자인 제품을 사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디자이너들이 이런 트렌드에 앞장서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미 실천하고 있는 디자이너들, 기업들이 있다.


건축가 윌리엄 맥도노휴와 브라운 가르트 교수는 ‘요람에서 요람까지’라는 제품 디자인 철학을 내놓았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새로운 디자인은, 자연 재료를 이용해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며, 사용한 뒤에는 완벽하게 분해되어 에코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디자인이다. 에어버스 사는 이 철학을 도입해서 자연 상태에서 분해되는 좌석을 만들었는데, 이 좌석은 생산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나중에 폐기할 때도 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물론, 폐기 비용도 훨씬 줄였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제품 디자이너 톰 딕슨은 압축한 풀로 만드는 도자기 그릇을 만들었다. 안드레아 루기에로가 디자인한 1회용 접시 UFO도 자연에서 분해되는 제품이다. 에콰도르에 있는 서핑보드 업체 쿤티키는, 폴리스티렌이나 폴리우레탄이 아니라 열대 지방에 많이 자라는 발사 나무로 서핑 보드를 만든다. 이 나무로 합판을 만들 때 아마씨유를 써서, 제작 과정에서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을 뿐더러 나중에 재활용도 할 수 있다.


‘바이오 플라스틱’이라는 새로운 재료가 떠오르면서 의학 분야나 포장재, 케이터링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 재료는 녹말 셀룰로오스나 젖산으로 만들기 때문에 나중에 미네랄, 바이오매스, 물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된다. 분해될 때 탄소를 배출하는 만큼 흡수하기 때문에 대기 중 탄소량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필립 스탁이 2007년에 TED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새로운 스토리를, 새로운 시를 창조하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솔직히 책임이라고만 하면 웬만큼 투철한 지구적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나 실천하기 어렵고, 재미도 덜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톰 딕슨이 디자인했다는 압축한 풀로 만든 그릇을 쓰는 기분은 어떨까? 늘 보던 식상한 식기를 쓰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지 않겠나. 환경을 배려하는 생각 있는 사람도 될 수 있는 건 덤이다.



<루엘> 201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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